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블레스 오블리주 (문단 편집) === [[칼레]]의 [[시민]]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칼레1.jpg|width=100%]]}}}|| || {{{-1 <칼레의 시민> - [[오귀스트 로댕]] 작}}}[* 왼쪽부터 차례대로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(Eustache de St Pierre), 장 데르(Jean d'Aire), 피에르 드 위쌍(Pierre de Wissant)과 자끄 드 위쌍(Jacques de Wissant) 형제, 쟝 드 피엔느(Jean de Fiennes), 앙드리유 당드르(Andrieus D'Andres).][* 일반적인 위인상이 영웅적인 모습으로 미화되어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, 이 작품은 인물들의 우울, 공포, 내적갈등 등 심리 묘사가 세밀하여 수작으로 평가된다.] ||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히는 이 일화는 [[백년 전쟁]] 시기에 배경을 두고 있다. 영국과 오랜 시간 맞서 싸우던 프랑스의 칼레 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영국 왕 [[에드워드 3세]]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자, 에드워드 3세는 사절단에게 "모든 칼레 시민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에 그동안 저항한 죄를 물어 6명의 대표를 처형하겠다."는 말을 전한다. 전 시민이 살기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6명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의견이 분분하던 가운데, 도시의 최고 부호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자신이 죽겠다고 나섰고, 그 모습을 본 많은 칼레의 고위층들이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여 그 중 6명이 뽑혀 나왔다. 교수대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, 이들은 오랜 세월 임신을 하지 못했었던 영국 왕비가 임신에 성공해 왕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청하면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. 이 전설은 특히 19세기의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 활용되어 [[독일]]의 극작가 게오르그 카이저에 의해 '칼레의 시민'이란 희곡으로 쓰여지기도 했으며, 칼레 시청은 조각가 [[오귀스트 로댕|로댕]]을 압박하여 같은 이름의 동상을 제작하게도 했다. 그런데 매우 중요한 사실은 칼레의 시민 이야기의 유래가 중세 극작가 Jean Froissart의 '''[[허구]]에 의한 것이며''', 역사적 사료들 중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는 등 역사적 사실이 아닌 창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.(...)--감동하다 말았다.-- 또,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이 표현의 기원이 된 것도 아니다. 'Noblesse oblige'라는 표현은 19세기 프랑스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희곡 '골짜기의 백합(Le Lys dans la Vallee)'에서 처음 등장한다. [[그리스]]의 시인 [[호메로스]]의 [[일리아스]]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언급되는 등, 즉 고대 [[로마]] 시절부터 쭉 존재했었던 개념이 통일된 표현으로 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